노경식 작가와 함께한 격동의 ... |
장윤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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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풀이글 2-『노경식희곡집』완간을 축하하며
노경식 작가와 함께한 격동의 시대
閑月 장 윤 환 (전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 논설주간)
극작가 櫓谷 노경식 형과의 인연은 다소 야릇하게 시작됐다. 나는 1968년 5월부터 1975년 3월까지 동아일보 문화부에서 연극담당 기자로 일한 적이 있었다. 1970년 초였을까.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의 소개로 영미희곡 번역가 박영희를 알게 됐다. 갓 30대에 접어든 박영희는 당시 명동국립극장의 프로그램 안내판에 희곡번역자로 그 이름이 빠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잘 나아가고 있었다. 피차 술을 좋아해서 박영희와는 다른 연극인들과 함께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 박영희가 "극작가 노경식선생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당시 <달집>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노 작가의 성명은 알지만 아직은 면식 없다고 하자, 그녀는 마치 무슨 변괴나 되는 것처럼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명색이 연극기자라면서 동향 출신의 극작가를 모를 수가 있겠느냐는 것. 나는 전북 전주 출신이고 박영희는 군산이 고향이며 노 작가의 고향은 남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 작가와는 대면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 당시 연극계의 마당발 격인 박영희로서는 그런 자리를 만들 수 있을 법도 한 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러지를 못했다. 내가 노 작가와 처음 얼굴을 마주한 것은 엉뚱하게도 박영희의 빈소가 마련된 서대문에 있는「적십자병원」영안실이었다. 1973년 봄이었던가, 박영희는 밤 늦게 귀가하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32세의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박영희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여석기 교수와 임영웅, 김의경 씨 등 연극인들이 대거 몰려와서 너무나 일찍 세상 떠난 그녀의 최후를 애닲아 하던 빈소 안의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영안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어떤 준수한 용모에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동아일보 장기자시죠? 저 작가 노경식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주 비극적인 상황에서 마침내 상면하게 된 것이다. 박영희를 잃은 공동의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그 후로 나와 노 작가는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여석기 교수가 발행중인 『연극평론』의 편집을 맡고 있던 노 작가는 박영희 추모 번역극집 『슬픈 카페의 노래』를 맡아 제작했고, 신인 극작가 발굴을 위한 「영희연극상」을 제정하는 데도 여 교수를 도와 앞장섰다. 「영희연극상」을 만드는 데는 나도 약간 거들어 일조한 기억이 남는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나는 연극담당 기자 5, 6년만에 단막극 하나를 써서 무대에 올려보는 둥 연극인이 될 뻔했었다. 그러나 나의 행로는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1974년 가을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동아일보사에서 전개된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가 75년 3월 130여 명의 젊은 사원들과 함께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동아일보사는 광고탄압을 무기로 한 박 정권의 악랄한 압력에 굴복해서 자유언론 본연의 사명을 주창하는 자사(自社) 언론인들을 무도하게 몰아내고 만 것이다. 이후 우리는 현역 극작가와 한 연극애호가로서 오랜 세월을 여일하게 교유해 오고 있다. 노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공연할 때 뿐 아니라 볼만한 작품이 있을 때면 나를 데리고 다녔다. 내가 연극 공연장이나 연극계 행사장 같은 데 나타나면 반드시 내 곁에는 노경식이가 있었다. 노 작가 덕분에 현역기자 때 알았던 연극인뿐만 아니라 새로 알게 된 연극인들과도 교분을 쌓게 됐다.
나는 노 작가의 많은 작품들의 공연을 보았거나 작품을 읽었다. 어떤 작품들은 구상 단계나 집필 과정에서부터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곁에서 보아 온 바로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그가 지닌 관심 영역의 광대함과 끊임없이 솟구치는 창작 욕구의 열정이다. <징비록> <강건너 너부실로> <만인의총> <침묵의 바다> <두 영웅> 등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중국 대륙에서 전개된 항일무장 독립투쟁과 의병항쟁에 관련된 <흑하> <불타는 여울> <치마>가 있는가 하면, 산골의 계몽운동가 최용신을 다룬 <상록수>와 일본육군 소장 홍사익의 전범재판을 다룬 <번제의 시간>을 통해서 식민지 지식인의 두 극단(極端)에까지 시선이 미친다. 또한 노경식은 우리가 국토분단의 시대를 살아오고 있는 만큼 <격랑> <하늘만큼 먼 나라> <타인의 하늘> <북녘으로 부는 바람> <가시철망이 있는 풍경> 등 남북화해와 민족통일의 열망을 다룬 작품이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나는 노 작가의 작품세계를 평론하기에는 자격 미달이다. 다만 한 가지 기억 나는 게 있다. 해직기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징비록>(1975)이 공연될 때였다. 노 작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연출자 이해랑 선생이 하신 말씀이다. "노 작가의 작품은 철학성과 문학성이 있어. 무엇보다 레알리즘연극에 충실하지. 어디에다 초점을 맞출까 하는 숙제는 연출가의 몫이고 --" 노 작가의 작품세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노경식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서다. 그는 현실참여적 예술가이다. 그는 독재에 분노하고 항거했다. 그는 75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의 전신)에 가입했다. 연극인들이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할 때면 그가 반드시 그 일에 앞장섰다. 1987년의 “직선제개헌을 위한 시국선언”(연극인 17인선언, 5월)에 그가 의연히 참여한 것도 그 하나이다. 사적인 추억으로 말하면 70년대에 내가 동아투위「유인물 제작책임자」로 일할 때, 그 당시 우리 위원회에서 발표했던 ‘시국 성명서와 소식지 및 전단지’ 등 서류 뭉치들을 노 작가의 신림동(관악구) 집의 지붕 밑 다락 속에 수년 동안 감춰둔 적도 있었다. 왜냐면 어른 짐으로 한 보퉁이가 넘는 온갖 기록과 문서들을 행여 불시에 들이닥칠지도 모를 수사당국의 ‘우리 집’ 압수수색을 기피하기 위해서 ---- 이들 문건은 훗날 『한겨레신문』에 기증 보관되었다. 노 작가는 또한 우리 겨례의 하나됨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어디까지나 연극과 연극인 차원에서 말이다. 그가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서울평양연극제」사업 같은 것이 그 실례이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사를 다루었기 때문일까. 그는 격동과 시련의 역사의 홍수에 밀려서 해외로 흩어지게 된 동포들에 대한 배려도 남달랐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연극인들과 카자흐스탄(알마티) 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연극인들을 초청해서 교류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함께 살아 넘긴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은 실로 격동의 한 시대였다. 79년 ‘10.26’ 사태,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87년 ‘6.10 항쟁’, YS의 ‘문민정부’, DJ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를 거쳐 지금의 ‘MB정부’를 겪으며, “2013년 체제”를 바야흐로 눈앞에 두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후반은 노 작가의 두터운 우정과 한결같은 후의에 힘 입은 바 크다. 88년 『한겨레신문』창간 때 차범석 선생 등 연극인들이 대거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한 것도 모두 노 작가의 인품과 열성 덕이었다. 이제 畏友 櫓谷의 필생의 업적을 갈무리하는『노경식희곡집』제7권에 ‘뒷풀이글’을 쓰는 호사까지 누린다. 앞으로도 70대 노년의 중후하고 멋진 작품들이 계속 나올 것으로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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