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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하말씀] 임 선생님과 40년 ...
[축하말씀]

임 선생님과 연극인연 40년 세월

우리 한국연극의 큰어른 임영웅의 연극연출 60년을 맞이하여 賀詞 한마디를 드리는 바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의 졸작 <달집>과 국립극단과 임영웅님과의 3각 인연은 다음과 같은 글로써 시작된다.

“일찍이 아깝게 우리 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간 박영희(1973년 작고)라는 빼어난 희곡번역가가 있었다. 71년 어느 날 그녀가 나를 찾아와서 내가 연출했으면 좋을 것 같은 창작희곡이 있다고 <달집>을 추천했다. 원고를 보자고 했더니 당시 여석기 선생님이 간행하던 『연극평론』(제4호)에 실릴 예정이어서 지금은 인쇄소에 있다고 말한다. 급한 마음에 교정쇄라도 보자고 했더니, 당장 작가 본인에게 연락을 해서 정말 교정쇄를 가져왔다. --- 나는 그 즉시 <달집>을 국립극장에 추천했다.” (노경식희곡집 1권, 『달집』 뒷풀이글에서)

연출가와 작가로서 임 선생과의 연극인연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 물론 그에 앞서 일면식도 없던 시절, 그러니까 66년도에 나의 단막물 <激浪>(극단행동무대, 한국환 연출)이 명동극장 무대에 올랐을 때 당신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서 그의 ‘공연리뷰’에서 호평으로 잠깐 언급한 적도 있었는 데 그같은 사실은 나만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햇병아리 작가의 첫 번째 장막극이 그것도 내노라 하는 국립극단 정기공연에 오르게 됐으니 그런 영예가 없었고, 더불어 그 작품 <달집>이 그해의 「백상예술대상」(한국일보)에서 작품상을 비롯, ‘여우주연상’(백성희) ‘여우조연상’(손숙) ‘연출상’(임영웅) ‘희곡상’(노경식) 등등을 휩쓸다시피 했으니 그런 영광과 자랑과 기쁨이 어디 있었으랴!

연출가 임영웅 선생과 나 작가와의 공연인연은 더욱 계속된다. <달집> 이후로 1920년대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장군의 좌절과 비극을 소재로 한 <黑河>(국립극단 1978), 남북의 비극적 이산가족 문제를 다룬 <하늘만큼 먼나라>(극단산울림 1985),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돕기 위한 海南 울돌목의 바닷가 서민들의 항쟁을 극화한 <침묵의 바다>(국립극단 1987) 등 전부 4편이나 된다. 여기서 또한 기억에 남는 일은 ‘산울림의 하늘만큼 --’이 그해의 「서울연극제」에서 ‘대상’과 ‘남녀주연상’(백성희 조명남) 및 ‘연출상’(임영웅)을 받아내서 기염을 토한 일이다. ‘고모’ 역할의 박정자는 「동아연극상」의 ‘여자연기상’. 그런데도 유독 나 노경식만이 재수없이(?) ‘희곡상’을 비껴가서 맘속으로 섭섭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허허 --.

임영웅 선생은 나의 경우 극작가를 편안하게 한다. 임 선생은 작가의 작품을 몹시 존중한다. 혹여 작품의 수정을 요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작가 본인으로 하여금 보완하고 개작 손질하게 한다. 걸핏하면 젊은 연출가들이 남(작가)의 작품을 무단히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등 난도질하는(?) 것이 요즘의 트렌드라면, 대연출가 임 선생에게서 본받을 바가 많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임 선생과 한번도 낯 붉힘을 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엔가 나한테 임 선생이 미소를 머금고 이르는 말 --

“내가 같은 한 작가의 작품을 네 편씩이나 연출한 것은, 작가 노경식씨가 유일할 걸? 허허 --”

나는 우리의 임영웅 선생이 더더욱 老當益壯 강건하시면서, 나 노경식의 다섯 번째 희곡작품을 반드시 무대에 올리는 그날의 감격과 영예를 한껏 기다리기로 합니다.

끝으로, 이번의 축하 자리를 마련한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와 출연자 손숙 선생 등 배우들 및 스탭진 여러분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