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슬픔]- 한국연극협회 ... |
대학로 짝재기양말 (관객) |
|
<찬란한 슬픔> - 참담하고 처참한 비극
2002-07-09/대학로짝재기양말
상기하자 6.25 상기하자 5.18
우린 지금 어느 것을 더 상기해야 할까~ 세월을 처참했던 그때로 빠꾸해보면 아무래도 5.18이 가깝다.
연극 <찬란한 슬픔>은 80년 5.18 광주 얘기다. 찬란한 슬픔이 아니라 참담한 비극이고 핏빛이 낭자했던 처참한 5월이 있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은 핏빛 장미가 피고 그전 붉은 철쭉이 핀다.
전쟁 때도 아닌데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현장 - 80년 5월 빛고을 광주 국군도 보통 국군이 아닌 공수부대인 특수킬러부대였다.
이 연극은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진압군 공수부대 하사 <정이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다. 그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나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착하디 착한 그는 그 때 일에 대해 속죄하는 어린양이 되고자 하나 일개 개인으로 감당하면서 솎아내고 극복하기엔 거의 불가능한 불가항력이다. 그 당시 정하사(장용철 분)는 부상자들을 잡아다 모아 논 광주교도소 운동장에서 부상당해 응급치료를 받아야 할 살아있는 시민들을 사과 궤짝 같은 관에 쑤셔 넣고 못질해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하사가 벽에 계속 못질을 해대고 철쭉꽃을 몽땅 떼버리고 병실 바닥을 쓸고 닦고 닭 집을 만드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망월동 묘역에 가보고자하나 전남대를 비롯해 엉뚱하게 딴 데만 맴돌다가 끝내 못 가고 결국엔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해버린다.
이 연극은 남달리 5.18 광주의 피해자 시각보다는 진압군인 가해자의 피해상황과 결과를 관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보았다. 피해자는 시민과 군인 모두였고 가해자는 첨부터 한 놈이라고..
22년 전 그때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할 임무를 띤 군인들이 나라고 나발이고 무식하게 무시하고 광견병 걸린 미친 개새끼처럼 날뛰는 백정으로 돌변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무참하게 죽여갔다.
그 개새끼들의 괴수 전두환은 오늘도 시퍼렇게 살아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그 집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다. 대통령 해쳐먹은 귀하신 몸이고 백담사에서 속죄하신 고매한 몸이기 때문인가~ 어느 누구도 전두환 어케 해야하자는 말은 이미 물 건너갔다.
절은 왜 가나~ 전두환 전용 불교 별장 백담사로.. 까까중 대머리라 까까중 깍지 않아도 되었겠지~
용서가 되나~ 용서를 할 수 있나~ 시시껄렁하게 잘못한 일은 용서 안 하면서 엄청나게 잘못한 일은 용서하나~ 장자(莊子)가 한마디 한 '사과 한 개를 훔치면 도둑이 되고 나라를 훔치면 왕이 된다'는 것처럼 '한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 되고 한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그런 것인가~ 1995년 한국 검찰은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요상한 법 논리를 내놨다. 이에 앞서 일찍이 노자(老子)도 한마디했었다. '법이 없어야 법이 선다'고..
난 5.18, 전두환 얘기만 나오면 손 떨려서 글이 안 써진다. 22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증세가 남아있어 낮술 까먹으며 써야 겨우 써진다. 왜, 울 나라는 금방 식어버리고 잊어먹어 복수를 할 줄 모르는 <냄비근성>을 가진 민족이라고 일본기자로부터 비아냥을 받아야 하는가~ 2차 세계대전 끝난 직후 프랑스처럼 독일에 협조한 인간들 수천 명을 색출해내 파리시내 한복판에 모아놓고 돌로 때려죽인 일을 하지 못하나~
정의사회구현 - 빨갱이 보다 더 새빨간 전두환이 내건 거짓말이었다.
내 군번은 논산군번으로 12889992다. 80년 5.18 당시 난 육군 상병으로 대전에 있었다. 한밭 벌 탄방동 육군통신학교 본부중대 무늬만 행정병 주특기 900 인사참모부. 허나, 유사시 짜가 주특기 900은 원래 주특기 104로 둔갑해 보병이 되어 M60 기관총 사수가 된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대전으로 올라온다면서 100% 정보 차단된 상태에서 충정훈련 받으며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군인.. 민주 열사였던 그들을 빨갱이 폭도로 보고 발견즉시 무찔러야 하는 군인이었다. 당시 모든 군인이 그랬었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내가 있던 부대만 해도 그랬다. 평상시 받는 훈련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씨발새 광주 폭도새끼들 땜시 충정훈련으로 좆뺑이치며 더 힘들어 죽겠노라고.. 발견하기만 하면 그냥 아작을 내버린다는 적개심이 군대의 병영마다 감돌았다. 당시 사회의 어용 언론방송도 연일 생구라를 일삼았지만 사회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는 군대의 군인들은 사실과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터질지도 모르는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착하고 힘없고 뭘 모르면서도 오로지 정의감만 살아있어 데모를 했었던 백성들은 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정도가 아니다. 믿는 도끼에 백성들 대갈빡 쪼개지는 일은 이케 전국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시범케이스로 빛고을 광주만 존나리 얻어터진 것이다.
더 웃기는 일은 내가 광주에 갔을 때다. 1999년 초봄 난 작가 박근형과 배우 오광록 최일순과 넷이서 함께 코란도 오픈카를 몰고 대학로를 출발 전국을 돌다가 광주 망월동 묘역에 갔다. 거기엔 5.18 공원 묘역이 공무원 돈들인 듯 버젓하게 있고 진짜 망월동 묘역은 그 근처에 있는데 찾기 힘들도록 초라한 모습으로 있었다. 묘역의 자그마한 묘마다 크고 작은 사진들이 세워져 있었다.
80년 5월에서 19년이 지난 그 때야 거길 가보다니.. 교복 입은 학생,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 눈빛 살아있는 청년들.. 그 순한 얼굴들.. 웬지 눈물이 핑 돌았고 소주를 뿌려주며 원혼들을 달래주었다.
글고, 금남로 충장로로 가서 돌아다니다 난 일행과 떨어져 충장로에 한적한 웬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주인과 얘길 나눴다. 주인 남자는 80년 5월 그때 카빈총을 들고 트럭을 타고 다니며 싸웠다고 하는데 말이 신빙성이 있어 보여서 취재 수첩을 꺼내들고 메모를 했다. 젤 어이없었던 말은 19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명동 같은 광주의 금남로 충장로 일대에서 노는 젊은것들에게 그 때 일을 아무리 얘기해도 철들어 당해본 일이 아니니 무슨 신화나 전설정도로 알고있다는 것이다.
시민학살의 현장 광주가 그러니 딴 도시들은 어떠하겠는가~ 22년이 된 지금, 이런 면에서 보면 <찬란한 슬픔>같은 5월 광주에 관한 연극은 역사 현장 교육적 측면에서 계속 공연되어야 하고 영원해야한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말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 거여~'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 인간이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는 거여.'
이 작품을 연출한 연극연출가 <박용기> 선생.
칠순을 넘기셨고 암 투병 중에 있어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단다. 그래 많은 중견 원로 연극인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연극으로 그를 보고 있다.
연극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이라면 봐야 할 여러 가지 타당성 있는 이유와 의미가 있으므로 꼭 가서 보기 바란다.
7월5일~7월14일 평일 7시반, 금토일 4시반 7시반 소극장 학전블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