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극인 안녕하십니까' |
특별좌담 (한국연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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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 ‘북한 연극인 안녕하십니까’
새로운 통일연극의 변증법적 창조를 위하여
참석자 사회 : 유민영(연극평론가, 단국대 교수) 김동원(연극배우, 예술원 회원) 차범석(극작가, 예술원 회장) 장민호(연극배우, 예술원 회원) 백성희(연극배우, 국립극단 원로단원) 노경식(극작가, 남북연극교류위 위원장) 기록 : 김수미 기자
*유민영 : 남북한의 교류화해 문제가 두드러지고 있는 사회적인 기류가 문화, 예술방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한국연극협회에서는 지난 5월 @남북연극교류 특별위원회#을 정식으로 발족시켜 본격적인 남북연극 교류에 대한 준비를 갖추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통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문화의 교류가 우선시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원로 연극인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분단 이전에 같이 활동했던 연극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방직후 연극인들의 상황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 말씀해주십시오. 먼저, 그 당시에 연극을 하시던 분들 중에서 지금 북한에 살아계시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신지요. *차범석 : 해방 당시에 20대였다면 지금쯤 70대 정도가 되셨을 텐데요. 혹, 30대만 되셨다 하더라도 지금은 80대가 되셨을테니, 아직까지 생존해 계시는 분들을 많이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에 마침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았더니, 북한에 유경애(兪敬愛) 씨가 살아계신다더군요. *백성희 : 아, 그렇습니까. 그때 그분이 30대 정도 되셨던 것 같은 기억이 나는데요. *차범석 : 아마 지금쯤 82세 정도 되셨을 겁니다. *장민호 : 저는 해방 후에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성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동료들이 대개 나중에 월북을 했습니다. 당시에 연극동맹에 가입한 사람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연극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극인들이 방송국에 찾아와서 방송극을 하는 성우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요. 물론 어려운 생활환경 탓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때 성우들이 대개 월북한 연극인들인데, 예를 들자면 박학(朴學), 김동규(金東圭), 태을민(太乙民), 차천명(車天命), 유경애(兪敬愛) 씨 등이었습니다. 당시 유경애(兪敬愛) 씨를 생각해보면, 참 연기를 잘했다는 기억이 듭니다. 어쩌면 그렇게 연기를 잘했는지 마치 신들린 무당과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었지요. 살아 계시다니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뵐 수 있다면 좋겠군요. *차범석 : 1945년이었는지 47년이었는지 연도는 어렴풋합니다만, 당시에 조영출(趙靈出) 작의 <논개>를 극단 조선예술극장이 공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논개의 몸종으로 유경애(兪敬愛) 씨가 연기를 했는데, 끌려가는 논개를 가슴 아파하는 장면을 창으로 참 잘 소화했었습니다. *장민호 : 이번에 차범석 선생님께서 평양을 방북하실 때 제가 특별히 전두영(田斗榮)이라는 배우를 만나보고 오시도록 부탁을 드렸는데, 알고 보니 그 배우는 이미 작년에 작고하셨다고 하더군요. 그 분은 국립극장의 창립공연 <원술랑>에 출연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도 여러 공연을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 참 미남자였습니다. 키도 훤칠하니 컸죠. 성격도 소탈했던 좋은 배우였습니다. 그분은 북한의 유명한 인민배우였다고 합니다. 1985년 남북예술공연단 교환방문 때 서울에 왔던 예술가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북한의 예술가들의 정황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백성희 : 저도 그 분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참 멋진 분이셨지요. 제가 당시에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시곤 기특하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6․25이후에 북한 영화 몇 편이 들어 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 어떤 영화에선가 그 분을 보았습니다.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오는 유학생을 연기하셨지요. 비행기에서 내리시는 모습이었는데, 머리엔 멋진 털모자를 쓰고 계셨어요. 그 때 그분을 그렇게 영화에서 만이라도 다시 뵐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무척 보고싶은 분입니다. *노경식 : 그분의 연세가 어떻게 되셨었지요? *장민호 : 저보다 두 세 살 위로 많으셨으니, 아마도 75, 6세 정도까지 사셨을 겁니다. *유민영 : 자료를 보면 월북이 3차례에 걸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1차 월북은 1946년에 한번 있었고, 2차 월북이 1947년, 또 다시 정부수립 조금 전에 마지막 월북이 있었다고 합니다. *차범석 : 2차 월북은 1947년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해에 연극동맹 산하 3․1절 연극제가 있었고, 공연으로 함세덕(咸世德)의 <태백산맥>, 조영출(趙靈出)의 <위대한 사랑>이 있었는데 그때 연극인들이 많이 월북을 했었기 때문에 기억에 생생합니다. *김동원 : 황철(黃澈)씨가 가장 늦게 월북을 했지요. *차범석 : 그때 그 공연들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관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습니다. *장민호 : 제가 듣기로는 관객이 국도 극장을 한바퀴 돌아서 줄을 섰을 정도로 굉장했다고 했습니다. 관객이 골목 끝까지 늘어 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차범석 : 관객들이 그 공연들을 그토록 열광했던 까닭은 그 내용이 반봉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대한 사랑>의 경우는 그 내용이 <춘향전>의 모조품 정도일 뿐인데, 그것이 관객들에게는 조선왕조 말기의 부패한 권력구조에 대한 공격이며, 계급투쟁 사상을 강조한 것으로 비춰졌을 테니까요. *유민영 : 계급투쟁까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반외세와 반봉건주의적인 성격의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동원 : 사실상 월북자들의 사상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들 대부분이 공산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대개가 동양극장 출신의 연극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이데올로기에 투철했던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장민호 : 당시에는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 사상적 혼돈과 긴장이 극도로 팽배했던 시기였습니다. 연극 판플렛에 붉은 글씨만 들어가도 사회주의자 취급을 받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유민영 : 그런 면에서 보면, 당시의 연극인들은 일종의 정치사회적 희생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장민호 : 박학(朴學) 같은 사람은 젊었을 때 참 촉망받는 배우였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차범석 : 박영신(朴永信), 배용(裵勇) 씨 같은 사람들은 북한방송을 통해 해설하는 것을 몇 번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계속 활동했던 사람들로는 김양춘(金陽春), 유경애(兪敬愛), 태을민(太乙民), 이재현(李載玄), 박제행(朴齊行) 씨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유민영 : 작가로는 송영(宋影), 신고송(申鼓頌), 박영호(朴英鎬), 조영출(趙靈出), 김태진(金兌鎭) 씨 등이 있습니다. *김동원 : 배우 중에 남궁연(南宮蓮) 씨도 있었지요. *장민호 : 남궁연(南宮蓮) 씨는 허집(許執) 작, 연출의 <상록수>란 작품에 출연했었습니다. *차범석 : 허집 씨는 사비를 털어 무대예술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구파와 신파에 대한 대립을 표면화시켰던 연극인이었습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그랬지요. 예를들어 그의 아버지는 당시 전라북도 어느 지역의 경찰서장을 지내셨다는데, 허집은 군대를 안 가겠다는 문제로 아버지와 충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사실상 부모일지라도 친일을 했다면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고, 실제로 그 이야기를 쓴 것이 <큰 집>이라는 작품입니다. *백성희 : 저는 1949년 허집 선생의 <높은 암산> 작품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허집 선생이 제 연기(주디 역)가 신파라고 어찌나 혼을 내셨는지 무대 위에서 연습할 때 손발을 다 떨었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원망스럽기도 했지요. 제 연기의 어디가 그렇게 신파같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때는 이해를 하지 못했던 많은 부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김동원 : 허집 씨의 첫 연출은 대학 연극제 때 <고골리 검찰관>을 각색한 <전선>이었습니다. *차범석 : 허집 씨는 새로운 연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 던 것입니다. 진부하게 늘상 반복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유민영 : 연출가 중에 안영일(安英一), 주영섭(朱永涉) 나웅(羅雄), 이서향(李曙鄕) 씨 등이 있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그들에 대한 기억은 어떠하신지요? *김동원 : 주영섭 씨는 고향이 이북이었습니다. *유민영 : 연출가 한태천(韓泰泉) 씨도 이북 흑룡강 어딘가가 고향이었지요. 그의 아들로 한 진이 있었습니다. 그도 북한의 인민배우이지만, 그리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민호 : 진우촌(秦雨村) 씨도 월북을 했던가요? *차범석 :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백성희 : 현대극장 맴버를 회상해 보면, 강홍식(姜弘植), 김선영(金鮮英), 이서향, 배용(裵勇), 강정애(姜貞愛), 안영일(安英一) 씨 등이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그때 어린시절의 눈으로 보기에는 배용(裵勇) 씨와 유치표(柳致杓) 씨 사이에 좀 색다른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동원 : 배용(裵勇) 씨와 유치진 선생의 여동생이셨던 유치표 씨는 나중에 부부가 되었지요. *백성희 : 그랬군요. 아, 그럼 그때 제가 보았던 모습은 두 분이 좋아 지내시던 모습이었군요. 그 분들을 회상해보면 늘 함께 조용히 앉아 계시던 모습이셨던 것 같습니다. 과묵하면서도 늘 책을 읽으시던 배우들이면서도 지성적인 면모를 몸소 보여주셨던 분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배우들이 그런 모습을 배울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요. *장민호 : 제 기억으로도 월북 배우들이 연극관련의 책을 항상 책보에 싸 가지고 다니시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가방이라는 게 특별히 없었으니까 그냥 책보에 둘둘 말아 다니셨던 것이죠. 특히, 박학(朴學) 같은 분은 꼭 2권씩을 들고 다니셨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들 모자는 깊게 눌러쓰고 다니셨던지…(웃음) 여하간 당시의 많은 연극인들은 @공부하는# 연극인들이라는 인상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백성희 : 강홍식 이란 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김동원 : 그분은 원래 성악을 했었습니다. *백성희 : 예전에 보면 젊은 처녀 총각들이 $봄이 왔네 봄이와……*라는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었는데 그게 강홍식 선생님이 연극하기 전에 불러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노래였지요. $물새야, 왜 우느냐* 하는 노래도 그분이 하는 것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현대극장에서 후배들을 참 아껴주시던 분이셨습니다. 체격도 좋으시고 남자다우셨지요. 그분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 분과 함께 공연했을 때인데, 그것이 <봉선화>라는 작품을 가지고 목포 공연을 갔을 때였을 겁니다. 한번은 분장실에서 저를 보시곤 손목을 끌고 데리고 나가셨어요. 그리곤 약국엘 데리고 들어가시더군요. 갑자기 그분이 그러세요. 뭐 사줄까, 그래서 제가 머뭇거리다가 문득 샴푸 생각이 나서 머리 감고 싶으니 샴푸 하나 사달라고 했어요. 당시엔 샴푸, 그게 얼마나 비쌌습니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잘 써보지 못하는 것이었잖아요. 그랬는데, 글쎄 그 분이 주인에게 그 비싼 샴푸를 @박스로# 몇 개 달라시는 거예요. 그 비싼 것을 글쎄, 그렇게 사주시더란 말이지요. 그것을 이제는 좀 갚고 싶은데…… 아직 생존해 계시는지 어떠신지 조차 소식을 알 길이 없으니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장장******민호 : 그 분 딸이 강효실(姜孝實) 씨인데, 그분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월남 이후에 강효실 씨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었지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조선영화 촬영소 소장이었는데 그 시절에 일주일에 한 번씩 김일성 주석이 아버지를 찾아와 보신탕을 늘 함께 즐겨 드시더랍니다. 백성희 선생님 기억으로도 그랬지만 강홍식 씨는 참 배포가 큰 사내다운 분이셨습니다. *노경식 : 이쯤해서 제가 고설봉 선생님이 정리하신 <이야기 근대 연극사>(창작마을, 2000년)에 기록된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의 명단#을 빌어 분야별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작가로는 임선규(林仙圭), 박영호(朴英鎬), 김태진(金兌鎭), 송영(宋影), 함세덕(咸世德), 조영출(趙靈出), 신고송(申鼓頌) 씨 등이며, 연출가로는 나웅(羅雄), 안영일(安英一) 등과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 중에는 작가이면서 연출가이기도 한 분들도 계십니다. 다음은 남자 연기자입니다. 황철(黃澈), 심영(沈影), 김동규(金東圭), 이몽(李夢), 태을민(太乙民), 박학(朴學), 배용(裵勇), 이단(李丹), 김두찬(金斗燦), 탁월(卓越), 박창환(朴昌煥), 양진(梁進), 유현(柳玄), 한병각(韓丙珏), 강선기(姜善基), 최건방(崔健芳), 황민(黃民), 임사만(任士滿), 전두영(田斗榮), 김유풍(金裕豊), 한일송(韓一松), 이재현(李載玄), 이재덕(李載德), 최계식(崔桂植), 황영일(黃英一), 강홍식(姜弘植) 등이 있습니다. 여자 연기자로는, 김선영(金鮮英), 김양춘(金陽春), 최예선(崔藝善), 문정복(文貞福), 남궁연(南宮蓮), 유경애(兪敬愛), 이정순(李正順), 박영신(朴永信), 김선초(金鮮草), 이정자(李貞子), 엄미화(嚴美花), 차천명(車天命), 임효은(林孝恩)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밖에도 앞서 말씀하신 여러 명의 연극인들이 더 있습니다. 혹시라도 지난 연극인들을 회상하시는 데 더듬이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 중의 몇 분을 더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민영 : 김선영(金鮮英) 씨는 국립극장 배우까지 했던 연극인이었습니다. 그 배우는 단순히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이라는 측면이라면 모를까, 달리 뭔가 이유가 있어서 월북한 사람들과는 좀 구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김동원 : 여자 배우 중에서 좋은 배우를 뽑는다면, 김선영(金鮮英) 씨와 유경애(兪敬愛) 씨를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 배우 같은 경우에는 황철(黃澈) 씨를 따라 올 사람이 없었지요. 조연으로는 태을민(太乙民) 씨가 참 좋은 배우였습니다. *장민호 : <봉선화>작품을 할 때에는 입석까지 관객들이 늘어섰는데, 황철 씨가 돌아오는 장면에서 $…나다.*하고 들어서니까 관객들이 얼마나 우뢰와 같은 박수를 쏟아내던지…. *백성희 : 목소리는 또 얼마나 그렇게 크고 좋던지요. *김김*기김 rlallllll동원 : 임선규(林仙圭)의 <바람부는 시절>은 코메디 작품인데, 그 작품에서 황철(黃撤) 씨가 충청도 사투리를 써 가면서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런 배우는 못 봤습니다. 그런 배우는 50년에 한번 날까말까 할 정도입니다. *유민영 : 월북한 연극인이 100여 분 정도 되지요? *장민호 : 정말 연기 잘하던 배우들이 많이 넘어갔습니다. 특히, 동양극장 출신의 뛰어난 배우는 대개가 월북했다고 할 수 있지요. *노경식 : 동양극장 쪽에서는 황철(黃澈), 박학(朴學) 씨 같은 분들 외에 어떤 분들이 더 계십니까? *백성희 : 그 분들이 사실은 굉장한 분들이셨어요. 차범석 : 그 밖에도 박창환(朴昌煥), 한일송(韓一松), 박고송(朴古松), 장진(張陣), 강정애(姜貞愛) 씨 등이 있습니다. *유민영 : 그 분들이 왜 월북을 하셨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그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사상적인 면에 동화되어 넘어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영호(朴英鎬), 신고송(申鼓頌), 나웅(羅雄), 안영일(安英一), 이서향(李曙鄕) 씨 등과 같은 연극인들이 그렇겠지요. 두 번째는 고향이 그쪽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장민호 : 꼭 사상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실상 연극동맹에 가담했던 연극인들에 대한 미군정의 감시와 탄압이 많았으니까 자연히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어찌보면 그 당시로선 그곳이 연극인들의 유토피아적 환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백성희 : 그 얘기들이 꼭 감언이설만은 아니지 않았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연극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얘기하자면, 예술가에 대한 대우라든지 그들의 사회적 위상은 지금하고 비교해 보아도 여러 측면에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유민영 : 생활이나 예우면에서 확실히 보장된다는 생각에서 월북했다는 말씀이시군요. 당시에 보면 연극인들이 설 자리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장민호 : 한 예를 들어서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에 우리나라 여배우는 나이롱 양말을 신을 수가 없었는데 그때 그쪽 여배우들은 다 배급이 되어서 신었더란 말입니다. *백성희 : 연극배우들은 카드 같은 것이 있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구입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연극배우들에 대한 대우는 특별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유민영 :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많은 유능한 배우들이 월북하면서 북한연극의 토대를 닦게 된 것이 아닙니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탄탄한 토대 위에 그 분들의 뛰어난 예능이 합쳐졌을 테니 북한의 문화, 예술적인 측면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장민호 : 아무리 이념적인 목적극이었다 할지라도 그 당시에 제가 본 북한연극은 탄탄할 뿐만이 아니라 신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실제 당시에 우리쪽의 무대장치란 것은 문을 하나 만들어도 그림을 그려서 열고 닫는 시늉을 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당시의 그쪽의 무대에서는 실제로 문을 만들어 올렸더란 말입니다. 손잡이를 돌려서 열고 닫는데 놀라웠습니다. 간혹 어떤 무대를 보고 있을 때면, 예술이란 것이 과연 저런 것이구나 했을 정도이니까요. *차범석 : 그곳에서는 어린아이때부터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니까 어느 면에서 보나 배우의 기술면에서는 뛰어난 면이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유롭지가 못한다는 것이 개성을 키우는 점에서는 역효과를 내고 있죠.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게 마련 아닙니까. *유민영 : 북한에는 이념적인 목표와 예술지도란 것이 있어서 자율성을 상실한 반면 기술적인 면이나 연극전반의 토대가 탄탄한 기초 위에 발달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고, 남한에서는 정책적인 지원이 미약해서 연극계 전반이 부실하고 그 토양이 취약한 반면에 자율적이기 때문에 다양성이 존재하지요. 만일 이러한 북쪽의 연극기술과 남쪽의 다양성과 창의성, 자유분방함이 합쳐진다면 훌륭한 새로운 연극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통일연극의 변증법적 발전이랄까…… *차범석 : 문화 예술방면의 사람들이 서로 오가는 일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양쪽의 연출가나 배우들을 초빙해서 서로의 장점을 조금씩 천천히 배우고 흡수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유민영 : 그런 측면에서 남북 연극의 교류에 있어서 방법적인 면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쌍방의 연극을 관람하는 단순한 일에서부터 양쪽의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호 예술의 이해 차원에서 왕래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연기, 연출, 무대미술 등 분야별 워크숍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세 번째로는 공동창작과 작품정보 교류까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민호 : 아직 공동창작까지는 어렵지 않을까요? 적어도 앞으로 5년이고 10년이고 간에 급하게 서둔다는 생각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은 무엇보다 인적교류와 공연정보 교환 같은 물적교류로써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서로 거부감 없이 천천히 연극적인 예술환경을 익히는 일이 중요하니까요. *노경식 : 그런 의미에서 $연극인 가족찾기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반드시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더라도 우리 연극예술인들은 모두가 이산가족인 셈이니까요. *차범석 : 해방 당시에 활동하다가 월북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묻던가 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자리가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현재 북한의 인민배우로 유명한 사람들은 차계룡, 곽언우, 조청리 등과 같은 사람들이랍니다. *유민영 : 연극인들 사이에 태어난 연극인 2세가 있기도 하겠지요. 후손들 중에도 연극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꼭 우리가 찾는 예전의 연극인들이 아니더라도 2세를 만나는 일 또한 의의가 깊고, 하나의 반가운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북통일 문제가 점차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져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눈앞에 실현되는 현실로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분단 반세기를 넘어서 길고도 먼 시간여행을 위해 함께 동참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캡션순서 : 차범석 -> 장민호 -> 백성희 -> 김동원 -> 유민영 -> 노경식
차범석 : 1945년이었는지 47년이었는지 연도는 어렴풋합니다만, 당시에 조영출(趙靈出) 작의 <논개>를 극단 조선예술극장이 공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논개의 몸종으로 유경애(兪敬愛) 씨가 연기를 했는데, 끌려가는 논개를 가슴 아파하는 장면을 창으로 참 잘 소화했었습니다. 장민호 : 당시에는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 사상적 혼돈과 긴장이 극도로 팽배했던 시기였습니다. 연극 판플렛에 붉은 글씨만 들어가도 사회주의자 취급을 받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백성희 : 배용 씨와 유치표 씨 등은 과묵하면서도 늘 책을 읽으시던 배우들이면서도 지성적인 면모를 몸소 보여주셨던 분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배우들이 그런 모습을 배울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요. 김동원 : 임선규(林仙圭)의 <바람부는 시절>은 코메디 작품인데, 그 작품에서 황철(黃撤) 씨가 충청도 사투리를 써 가면서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런 배우는 못 봤습니다. 그런 배우는 50년에 한번 날까말까 할 정도입니다. 유민영 : 북쪽의 연극기술과 남쪽의 다양성과 창의성, 자유분방함이 합쳐진다면 훌륭한 새로운 연극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통일연극의 변증법적 발전이랄까…… 노경식 : 그런 의미에서 $연극인 가족찾기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반드시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더라도 우리 연극예술인들은 모두가 이산가족인 셈이니까요.
캡션순서 : 차범석 -> 장민호 -> 백성희 -> 김동원 -> 유민영 -> 노경식
차범석 : 1945년이었는지 47년이었는지 연도는 어렴풋합니다만, 당시에 조영출(趙靈出) 작의 <논개>를 극단 조선예술극장이 공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논개의 몸종으로 유경애(兪敬愛) 씨가 연기를 했는데, 끌려가는 논개를 가슴 아파하는 장면을 창으로 참 잘 소화했었습니다. 장민호 : 당시에는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 사상적 혼돈과 긴장이 극도로 팽배했던 시기였습니다. 연극 판플렛에 붉은 글씨만 들어가도 사회주의자 취급을 받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백성희 : 배용 씨와 유치표 씨 등은 과묵하면서도 늘 책을 읽으시던 배우들이면서도 지성적인 면모를 몸소 보여주셨던 분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배우들이 그런 모습을 배울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요. 김동원 : 임선규(林仙圭)의 <바람부는 시절>은 코메디 작품인데, 그 작품에서 황철(黃撤) 씨가 충청도 사투리를 써 가면서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런 배우는 못 봤습니다. 그런 배우는 50년에 한번 날까말까 할 정도입니다. 유민영 : 북쪽의 연극기술과 남쪽의 다양성과 창의성, 자유분방함이 합쳐진다면 훌륭한 새로운 연극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통일연극의 변증법적 발전이랄까…… 노경식 : 그런 의미에서 $연극인 가족찾기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반드시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더라도 우리 연극예술인들은 모두가 이산가족인 셈이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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