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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의 짧은 글 및 에세이입니다.
'자아~ 깨자, 쥐어박자!' 추모의 글
 
[白楊 권오일 선생 1주기에 부쳐]

“자아~ 깨자, 쥐어박자!”

白楊 권오일 선생이 이승을 떠난지도 1년, 세월은 어느새 그렇게 빠르게 흐르는가싶다. 작년 바로 이맘 때쯤에 경상도 진주에서 열린 ‘영호남연극제’에 초청 참석차 서울 연극인 여러 분이 아랫녘으로 내려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꼬박 1년 전 일이라니! 시방 나는 1년 전 그날의 사진 한 장을 내 책상 머리에서 훑어보고 있다. 그건 그 전날 연극제의 개막식에 내려갔다가 술 실컷 얻어묵고 밤새껏 연극계 잡소리(?) 이런 저런 얘기 떠들어대다가 이튿날 해장술 겸 아침을 때우고 나서, 다시금 귀경길에 주마간산 격으로 잠시 들러봤던 “지리산 靑鶴洞”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 하나. 울울창창 짙푸른 숲을 등지고 청학의 길따랗고 뽀쭉한 머리 모양새를 형상화한 아름다운 본채를 배경으로 하여 찍은 그 사진 속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장(민호), 백(성희) 두 분 선생을 중심으로 좌우에 늘어서 있는 사람은 윤조병 유용환 노경식 김길호 권성덕이며, 그 앞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서영수(진주)와 김완수 김도훈, 그러고 정대균(진주) 등등.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사진 속에 한 사람 권오일 선생이 없다. 아니 이런! 확실히 우리의 백양 선생도 다 함께 동행이었는데 --
지금에사 돌이켜보면 그때 백양 선생은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두 다리가 몹시 불편한 탓으로 걷기 힘들어서, 그냥 모른체 숨기느라고 차속에서 내려 딴곳만 바라보고 계겼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대학로의 연극왕초(?) 권오일은 채 1주일을 못넘기고 우리 곁을 떠나 홀연히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嗚呼痛哉라, 애달프고 서러운 것. 이 사진은 ‘권오일 없는 마지막 사진’이 되고 말았구나!

엊그제도 윤대성과 남일우 나, 셋은 대학로의 대폿집에 앉아 술잔 들고 백양 선생을 회억했다. 마치도 아직은 우리 곁에 살아 계셔서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있거나, 어느 술집에 앉아 계시거나 --
권 선생은 평소에 이런 전화를 곧잘 하신다.
“나, 백양 올시다. 櫓谷(나의 호)이오? 집에서 뭣 해. ‘이찌 꼬뿌’(술 한잔) 헙시다. 대학로에 나와요.”
“아, 예에- 선생님. 허허.”
나는 댓바람에 선생님을 찾아 &#51922;아나간다. 비단 나 하나뿐이었랴. 우리 동세대의 연극인들은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연극인 권오일이가 없는 대학로는 생각할 수없다’고. 그래서 그런지 우리 늙은이들은 요즘엔 대학로에 나갈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권 선생이 대학로에 없으니 만날 인사도 별로 없는 것 같고. 해서 얼마 동안은 우리끼리 술자리라도 마련하게 되면, 반드시 꼭- 권 선생 몫의 술컵 한 잔을 따로 채워놓고서 이렇게 읊어댔다. 자~ 권오일도 여그 앉아 있다 치고, 백양 선생 말씀대로,
“자아~ 깨자, 쥐어박자! 하하 --”
그렇게 우린 아쉬움과 허전함을 달래가며 첫 술잔의 ‘간뻬이‘(건배)를 시작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짓도 망각의 세월 속에 시나부로 잊혀져가고. 허나 우리에게 백양 권오일 선생의 연극인 자리와 위상은 그만큼 크고 넓다고 아니할 수 없으리라. 우리들이 시방껏 살아온 십수년의 달고 쓴 연극인생이란 것이 그 얼마인데.

1년 전 그날 벽제 화장터에서 권 선생님을 떠나보내고 대학로에 다시 돌아와 술집 ‘분장실’에서, 배우 정현의 절창 <고향생각>을 들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모른다. 누군가 때리지도 않는데 하염없이 줄줄 눈물을 흘려가며 --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고/ 밝은 달 쳐다보니 눈물만 흐른다/ --”

연극인 우리의 백양 권오일 선생, 길이 명복을 빕니다! (끝)

* 극단 성좌 제131회 공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2009. 9. 2-27, 대학로 엘림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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